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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의 이씨는 한국 자생(自生)의 이씨와 외국에서 귀화한 외래(外來)의 이씨로 나눌 수가 있다.우리 나라는 처음에 성이 없다가 통치자 곧 귀족부터 성이 있게 되었는데, 문자가 없었으므로 자연 중국 한자(漢字)로 표기하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의 이씨는 본관이 237본이나 된다. 이 중에서 역사가 제일 오랜 성은 경주이씨이고, 중국에서 귀화한 대표적인 이씨는 연안이씨(延安李氏)이며, 월남에서 귀화한 화산이씨(花山李氏)도 있다.

그러면 우리 전주리씨는 어디에서 나왔는가?
< 중국(中國)에서의 귀화설(歸化說) >
작자 연대 미상의 <완산실록(完山實錄)>에는 우리 시조에 대하여 이렇게 씌어 있다. 야사(野史) 실록(實錄)을 참고해 보면 우리 시조 사공공의 휘는 한(翰)이요, 자는 견성(甄城)이시다. 공은 본디 중원(中原 : 中國)에 살았는데, 태어나실 때부터 거룩하여, 총명이 과인하시고 재질이 특이하여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시었다. 공의 나이 15세에 한림원에 입학하시고, 계모 주씨(朱氏)가 매우 사납고 악했으나 지극한 효성으로 모시었다. 그래서 그 때 동요에 `오얏나무 밑에서 반드시 왕기가 나타나리라.' 하더니, 마침 배가(裵哥)에게 모함을 받아 공이 바다를 건너 우리 나라로 오니, 그 때 나이 18세였다. 나이 약관도 되지 않아 문장이 비범하고 도덕이 탁월하여 인자한 기풍을 크게 떨쳤다. 불과 수년에 사람들의 칭송하는 소리가 조정까지 들려 신라의 문성왕(文聖王)이 불러 사공 벼슬에 임명하였고, 1년 남짓 다스리매 국정이 공평하여 모든 관원들이 교화되고 만백성들이 즐겼다. 그래서 태종(太宗)의 10세손 김은의(金殷義)가 사위를 삼았다.' 곧 사공공은 본디 중국인으로 배씨의 모함을 받아 신라로 와 사공 벼슬에 올라 김씨를 아내로 맞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출처 미상의 <이씨 득성의 유래(李氏得姓之由來)>란 글에서는 중국 이씨의 역사를 약술하고서 끝 부분에 `우리 전주리씨가 본래 중국 당(唐)나라 황실의 후예라 하나, 그 파계와 원류를 밝힐 분명한 근거가 없고, 우리 시조 휘 한(翰)으로부터 대대로 완산인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시조 : 이한(李翰)시조는 신라 때 사공(司空)을 지낸 이한(李翰)이다.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시조로부터 22세, 즉 한의 21대손이다.그러나 성계의 고조부인 목조(穆祖) 안사(安社) 이전의 사적(事蹟)은 전혀 기록에 전해지지 않는다.

<그림>조경단(肇慶壇) 전주리씨의 시조이신 신라 司空公 이한(李翰)의 묘소. 전주시 덕진동 건지산에 있다. 태조고황제께서 守護軍(수호군)을 두어 건지산 묘역을 守直(수직)케 했으며 역대 제왕도 묘역일대를 보호 하였다. 특히 고황제께서는 광무3년(1899)에 단(壇)을 모으고 매년 1회 제사를 봉했으며 450정보의 단역壇域)을 마련하게 하였다.단은 장방형의 돌을 사용하여 둘레를 쌓아 만들고 단의 주변에는 동서남북에 문이 있는 담을 쌓았다. 서향의 문과 일직선상에 대문을 남향의 문에서 20m비석은 대리석이며 너비 180cm, 두께30cm, 높이 202cm이다.

앞면에는 고종의 어필로 된 대한조경단이라고 쓰여진 전제가 새겨져 있다. 비각은 한변이 7.2m의 정방형의 3칸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호남지』 전주 단묘에 의하면, 조경단 재건지산 세전 사공공기재차무징 고종기해설 건각입비 수봉관일이라 하였는데, 고종기해는 광무3년이므로, 이때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방기념물 제3호(1973. 6. 23 지정)
위치 :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 1가 산 28
면적 : 30,248㎡
소유자/관리자 : 국유/전주시
이용안내 : (0652)281-2553, 281-2554

안사는 원래 전주 사람이었는데, 그곳 지주(知州:지금의 지사(知事))와 사이가 나빠 강원도 삼척(三陟)으로 옮겨갔다가 얼마 뒤 지주(知州)가 다시 그곳으로 부임해오자 가족을 데리고 간도(間島)지방으로 가서 원(元)나라의 다루가치[達魯花赤:地方官]가 되었다. 그의 아들 익조(翼祖) 행리(行里 : 성계의 증조부), 또 그 아들 탁조(度祖) 춘(椿 : 성계의 조부)도 때때로 두만강 지방의 천호(千戶)로서 원나라에 벼슬했고, 춘의 아들 환조(桓祖) 자춘(子春)도 원나라의 총관부(摠管府)가 있던 쌍성(雙城 : 영흥(永興))의 천호를 지냈다.

자춘은 공민왕의 북강(北疆) 회수운동에 내응하여 쌍성(雙城) 함락에 결정적인 공(功)을 세워 이 지방의 만호(萬戶) 겸 병마사(兵馬使)로 임명되었다. 성계는 영흥(永興) 태생으로, 22세 때 처음으로 고려(高麗)에 벼슬했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동북면의 병마사(兵馬使)가 되어 원군(元軍)과 왜구(倭寇) 토벌에 공(功)을 세워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이르러 이 때부터 고려 말 중앙정권의 중추에 등장하였다.


<그림>매년 4월 10일(양력)해외 전국각지에서 수많은 전주리씨 종손들이 모여 조경단대제(肇慶壇大祭)를 지낸다,


전주이씨(全州李氏)의 분파(分派)는 122파로서 거의 왕자대군(王子大君 : 嫡)과 왕자군(王子君 : 庶)을 파조로 하고 있으며, 시대 구분에 따라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즉, 이태조의 고조부인 안사(安社)의 상계(上系)에서 갈라진 파, 안사 이후 이태조 이전에 갈라진 파, 이태조(李太祖)의 후손으로 왕자대군과 왕자군을 파조로 하는 파이다.
<그림>건원릉(健元陵) 테조고황제의 릉 태조께서 테종 8년( 1408) 5월 24일네 승화 하시자 동년 9월 9일에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인창리( 현 구리시) 검암산에 모시고, 태종 9년(1409) 4월에 吉昌君 權近(권근)이 지은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안사(安社 : 18世) 이전의 분파로는 시조 한의 14대손인 단신(端信)을 파조로 하는 문하시중공파(門下侍中公派), 15대손 거(거)를 파조로 하는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17대손 영습(英襲)을 파조로하는 주부동정공파(主簿同正公派), 안사의 종손 윤경(允卿)을 파조로 하는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한의 21대손 귀을(歸乙)을 파조로 하는 문하평리공파(門下評理公派) 등이 있다.

안사(安社 : 18世) 이후 이태조 이전의 분파로는 안사의 아들인 안천(安川) ·안원(安原) ·안풍(安豊) ·안창(安昌) ·안흥(安興)의 5대군파(五大君派), 행리의 아들인 함령(咸寧) ·함창(咸昌) ·함원(咸原) ·함천(咸川) ·함릉(咸陵) ·함양(咸陽) ·함성(咸城)의 7대군파(七大君派), 춘의 아들인 완창(完昌) ·완원(完原) ·완천(完川) ·완성(完城)의 4대군파(四大君派), 자춘의 아들이며 태조의 서형제(庶兄弟)인 완풍군파(完豊君派)와 의안대군파(義安大君派) 등 18개의 파가 있다.

태조의 후손 분파(고종 이전까지)는 일반적으로 99파(25大君 ·74君)로 알려져 있지만 미취졸(未娶卒), 즉 미혼으로 죽었거나 무후(無後), 즉 후사(後嗣)가 없는 대군 ·군이 20명 정도가 되므로 실제로는 그 수가 줄어든다.

경기전
은 조선이 건국되자 왕가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으로써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하였으며, 태종 14년(1414)에 건립되었다. 조경묘는 경기전 담 밖의 북쪽에 위치해 있는데 이곳엔 전주 이씨의 시조 이한공과 시조비의 위패를 모셨다. 1894년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에 입성하게 되자 이때 전라감사 김문현 등은 경기전 이태조 영전과 조경묘 위패를 받들고 전주 동북쪽에 있는 위봉산성의 행궁에 봉안하였다. 이곳은 동학농민군의 혁명적 의지와 봉건적 규례가 엇갈리는 대표적인 현장이다.(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3가 102 )유형문화재 2호, 16호)
조선의 왕권은 전주이씨인 왕족(王親 ·宗親)을 주축으로 하고 왕대비 ·왕비 ·왕세자비의 동성친(同姓親 : 외척(外戚))과 이성친(異姓親), 그리고 왕녀의 배우자와 그 근친 등 광범위한 혈연관계를 왕권의 일차적인 토대로 하여 발전 ·유지되어왔다.

따라서 왕위를 둘러싸고 벌어진 골육간의 다툼은 조선 500년을 통해 계속되었다.역사적으로 전주이씨(全州李氏)는 방대한 씨족기반 위에서 정치권력 또는 정치세력의 중추를 이루었다.
즉, 상신(相臣:三議政) 22명, 문형(文衡:大提學) 7명을 배출하여 타씨족을 압도했으며, 문과 급제자 873명을 내어 이씨의 문과 급제자 총 3,190명의 27 %를 차지하였다.

전주이씨(全州李氏)의 100여 파 중에서 으뜸가는 명가는 밀성군파(密城君派:琛, 세종(世宗)의 아들)로서 6명의 정승(政丞)과 3대 대제학(大提學 : 홍문관, 예문관, 정2품 벼슬)을 배출했으며, 덕천군파(德泉君派:厚生, 정종의 아들)가 부자 대제학 등 3명의 대제학과 영의정 1명을 내어 밀성군파에 버금간다.

그 다음으로는 3명의 정승을 배출한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여(璵), 세종의 다섯째 아들), 정승 2명을 배출한 선성군파(宣城君派 : 무생(茂生), 정종의 아들), 정승 1명과 많은 문 ·무관을 배출한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 : 보(補), 태종의 둘째 아들) 등이 뛰어나고, 무림군파(茂林君派 : 선생(善生), 정종의 아들)와 덕흥대원군파(德興大院君派 : 초 , 선조의 생부(生父))는 무관(武官)의 집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전주이씨(全州李氏)의 후예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전주이씨 대동종약원(全州李氏大同宗約院) 측에서는 대략 500만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100여 파 가운데 후손이 가장 번창한 파는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가 으뜸이고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 ·덕천군파(德泉君派) ·밀성군파(密城君派) ·양녕대군파(讓寧大君派)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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